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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이야기

개발자를 그만두기로 했다(1)

by 자유로운 코끼리 2021.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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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20년,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존재로서의 실존적 고민보다는 당장 '해야 할 것' 같은 일에 빠져살았다.

-

2017년, 친해지고 싶은 오빠가 있었다. 스피치 동아리에서 만난 오빠였는데, 자신의 세계가 뚜렷하고 어떤 주제든 막힘없이 이야기하는 게 참 멋져 보였더랬다. 친해지고 싶어 전전긍긍하던 중 그 오빠가 단톡에 메시지를 보냈다.

"c언어 프로그래밍 수업 들을 사람! 내가 다 알려줄게. 코딩이 얼마나 매력적인 학문인지 들어보란 말이야!"

이거다! 당시 접점 하나 없는 오빠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저 c언어라는 걸 들으면 되겠구나- 싶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수업을 신청했다.

고생의 시작이었다. 다 알려준다던 오빠는 자신의 과제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이미 코딩에 대한 개념이 잡힌 사람들 속에서 나는 밑바닥을 깔아주는 존재였다. 무슨 수업 중에 실습이 그렇게 많은 지, 교수님은 틈만 나면 수학 문제를 프로그래밍으로 풀어보라 했다. 어릴 적 수학을 좋아했던 터라 문제를 푸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변수나 배열 등 '임의의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개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걸 하려니 재미가 없었고, 따라가기 급급한 시간을 보내며 그 오빠와 가끔 갠톡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위안 삼았다.

* 변수는 변하는 데이터를 넣어주는 값으로, 우리가 수학에서 주로 쓰던 x, y 등의 숫자를 떠올리면 된다.

* 배열은 동일한 크기의 데이터가 일렬로 나열화된 집합으로, 데이터를 나열한 기차(?)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 내 인생에서 코딩은 없다! 했더니 웬걸? 그 오빠가 '멋쟁이 사자처럼'이라는 동아리를 추천해 줬다. 코딩 공부하는 동아리인데 재미있을 거라고. 그 당시 눈에 띄는 대외활동이면 다 해치우던 터라 ‘어디 한 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고생길이 열렸다. 멋쟁이 사자처럼(이하 '멋사')은 웹 관련 코딩을 배운 다음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서비스를 만드는 동아리인데, HTML, CSS(웹 기초 언어)부터 시작해서 Ruby(프로그래밍 언어)까지... 당시에는 웹 언어와 프로그래밍 언어의 차이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결국 프로젝트도 거의 사람들이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정도였다.

다시 한번 내 인생에 코딩은 없다! 하려 했거늘 웬걸? 나는 어느새 2년째 멋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열심히 코딩 수업까지 직접 진행해가면서.

이때 즈음 과학도서에 빠져 "기술이 세상을 변화시킬 거고, 나도 세상을 변화시킬 거니까(?) 난 기술을 배워야 해!"라는 나만의 3단 논법을 펼치고 있었기에 코딩은 나에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웹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라는 욕심이 코딩을 하게끔 했다.

그러다 포스텍에서 인공지능 관련 수업을 진행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고,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인생을 바꾼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인공지능 관련한 대학원생이었는데, 그 사람은 코딩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재능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단어밖에 그 사람을 표현할 길이 없다. 포스텍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코딩을 하다 막힐 때면 그 사람을 찾았고, 그는 어김없이 모든 문제를 풀어냈다. 자연스레 재능의 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실 여기까지 였다면 '어차피 저런 천재들이 많겠어?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돼!'라는 마음으로 달려갔겠으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코딩을 저 사람처럼 즐겁게, 주말까지 할 자신이 없어."

재능의 문제가 아닌 태도의, 마음의 문제였다. "나는 저렇게 즐겁게 개발하고 있나?"에 대한 물음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고, 이 길에 확신도 사라져만 갔다. 그렇다면 내가 멋사를 그토록 오래하고, 포스텍에 수업까지 들으러 갔었던 이유는 뭘까.

 

나는 기술이 신비로웠다. 신기했고, 그것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세상을 바꿀만한 가능성을. 그래서 이를 이용하고 싶었고, 개발자가 되었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만드는 멋사가 재미있었다.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내니까. 하지만 개발, 그 자체가 재미있는가?에 대한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애매했다. 몰입은 잘하는 거 같은데, 보통은 이런걸 재미있다고 하는건가?

 

미친듯이 개발에 몰입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것을 단호하게 잡지도 못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 인턴으로 회사에 가게 되었을 때, 개발자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나는 개발자로 포지션을 잡았다. 기획쪽으로 정말 좋은 팀에서 일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개발쪽으로 가고자 했기에 가지 않았다. 생각을 깊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여태 코딩을 했으니, 해야만 할 것 같았고 또 나름의 탄탄한 길이 있을 거라 여겼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기보단 흘러가는 대로 살고자 했다.

어중간한 마음이었다. 이 길로 최고가 될 자신은 없지만, 다른 길을 선택하기는 두려웠다.

 

그렇게 어영부영 1년이 지났다.

애매한 태도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법이다.

뜨거웠던 사랑이 서서히 식듯,

나는 점점 개발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오래된 연인이 헤어지듯, 개발자를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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